2012. 01. 07.
기차 안에서 정민은 어느 길의 풍경에 대해 얘기했다. 어느 봄날 밤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삼촌이 <희랍인 조르바>를 읽고 있던 정민의 방문 앞에 와서 자느냐고 물었다. 문을 열었더니 환한 보름달을 등에 지고 삼촌이 서 있었다. 삼촌은 정말 멋진 것을 보여줄 테니, 같이 오토바이를 타러 가자고 정민에게 말했다. 그때가 새벽 한시였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정민이 망설이자, 만드시 지금 타야 한다고 삼촌이 강조했다. 왜 만드시 지금 타야 하느냐고 정민이 묻자, 삼촌은 일 년 중 그날 그 시간에만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대답했다. 일단 달빛이 환하고 벚꽃이 만발하고 오가는 차량이 없어야 하니까. 세상이 어떻게 다르게 보이냐는 물음에 삼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시간에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된 길가의 벚나무들이 오토바이의 둥근 헤드라이트 불빛을 향해 절하듯이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온 세상이 터널처럼 보인다고. 그 작고 환한 원 속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들어온다고.
그 말에 이끌려 삼촌을 따라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타긴 했으나 정민으로서는 과연 그 길이 그렇게 보이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귀를 멍하게 만드는 바람소리만이 온몸을 뒤흔들 뿐이었다. 그 바람소리만으로도 정민은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삼촌의 말에 따르면 그 밤길은 굽어서 꿈틀대는 벚나무와 담장처럼 단단한 바람의 벽과 둥글게 모여드는 빛들의 길이었지만, 정민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바람뿐이었다. 입고 있던 체육복만큼이나 정민의 온몸도 쉬지 않고 떨렸지만, 그녀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이 세상에 삼촌과 자신 둘 밖에 없다는 듯 그의 허리를 꽉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마치 김제에서 할아버지를 처음 보게 된 내가 아버지의 팔뚝을 움켜잡았듯이. 그럴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삼촌이 정민에게 “눈을 떠봐. 벚나무가 보일 거야”라고 말했고, 눈을 뜬 정민은 거기에 어떤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확인했다. 멀리있는 봉우리와 달만이 오토바이만큼 빠른 속도로 자신들을 쫓아 오고 있었을 뿐, 그 어떤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벚나무는 안 보여요!” 라고 정민은 소리쳤다. 벚나무는 보이지 않아요. 벚나무는 뭉개졌어요. 그런데 어디까지 가는 거에요, 삼촌? 정민의 망른 바람을 따라 멀찌감치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 길은 더 없이 고적한 길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두 사람을 중심에 놓고 빠르게 멀어지고만 있었다.
……
“.. 삼촌 말 때문인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벚나무들은 그 각각의 나무가 모두 하나의 나무인 양 반투명한 검은 몸통과 반투명한 하얀 꽃이 되어 포물선을 그리며 지나갔어. 마치 가드레일처럼 말이야. 그건 하나의 벚나무가 아니라 마치 벚나무의 일생이 한순간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어.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럼증이 났기 때문에 다시 눈을 감았어. 그리곤 소리치는 거야. 삼촌 눈에는 정말 벚나무가 보이나요? 몇번을 소리치면 삼촌은 속도를 늦추고 대답했지. 더 크게 눈을 떠봐, 정민아. 벚나무들이 이렇게 절하는 게 안 보이니? 그 순간 겁이 덜컥 나는 거야.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삼촌이 미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내 눈에는 그런 게 안보였거든. 더 웃긴 건, 그런데도 나는 삼촌의 허리를 더 꽉 움켜잡았다는 거야. 어떡하겠어? 삼촌이 괴물이라고 해도 그 때 내가 잡을 수 있는 건 삼촌의 허리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거짓말은 아니었나봐.”
“왜?”
“삼촌은 진짜 미쳐버렸거든.”
“왜? 새벽마다 혼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내가 웃으면서 얘기했더니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기껏해야 지금 이 기차 정도의 속도로 그 길을 달렸을거야. 하지만 이 기차 안에서는 나뭇가지들이 모두 뱀으로 바뀌는 장면을 본다고 해도 누구 하나 미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여기에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것은 그게 제아무리 괴기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를 미치게 만들지는 않아. 하지만 혼자서 새벽 두시의 국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다면 바라본 게 그저 평범한 벚나무일지라도 미칠 수 밖에 없는거야. 그런거야.”
정민은 입술을 깨물면서 차창 밖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런 생각도 해본 적 있어. 그 때 내가 벚나무가 보인다고 말했더라면 삼촌이 덜 외로웠을까. 그랬을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1.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1학년 때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작가도 재수없고 이거 읽으라는 교수도 재수없게 느껴졌는데, 과제한다고 이 책을 사두기를 잘했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읽으니까 책이 참 좋다. 나의 벚나무(a.k.a. at least soulmate)와 대화하며 나온 얘기처럼, 되게 당연한 감정을 되게 적절한 표현으로 끌어내는 능력.
누군가가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같이 벚나무를 봐주는 사람이 있는걸로 충분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새벽 두시의 전화벨소리, 나는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너는 미치지 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inner-peace 40% 회복. 매일 네시간을, 과거와 미래에서 보내는 벚나무와의 유사태아상태에서의 대화. 기묘하게 안정되니까 좋다.
2. 2012년 1월 7일? 8일의 다짐. 취직을 하자. 돈을 벌어서, 집에 커다란 책장을 하나 짜놓자. 읽고 싶은 책을 사서 보자. 매번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올해의 책 20권을 고르자. 남겨두자. 나머지 책을 모두 기증하자. 책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취직하자. 고로 공부하자.